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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통신대학교]중간과제물 : 한국사의 이해

by grimeyagi 2025. 3. 11.

 

교과목 : 한국사의 이해

과제유형 : 공통형

과제명 : 아래 문제에 대하여 교재를 참조하여 각각 서술해주세요. (서술한 문제당 6점, 총 30점)

(1) 청동기시대 경제생활의 변화상과 군장의 등장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설명해주세요.

(2) 6~7세기 삼국 관계와 대외항쟁에 관하여 설명해주세요.

(3) 신라 하대(말)의 ①동요 양상, ②새로운 세력과 사상, ③후삼국의 분열에 관하여 설명해주세요.

(4) 고려 초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관하여 서술해주세요.

(5) 고려 전기 역사서 편찬과 역사 인식에 관하여 서술해주세요.

 

과제 작성 시 지시 사항 : 작성 서식, 분량, 제출 방법, 보조 파일 사용 여부 등 기술

1) 과제물 지시사항에 따라 교재에 근거하여 각 문제의 정답을 상세하게 작성한 후, 정답과 관련하여 교재의 쪽수를 명확하게 표기하였습니다.

2) 과제물 지시사항에 따른 형식과 내용으로 완벽하게 작성하였습니다.

3) 한눈에 내용이 들어올 수 있게 가독성을 고려하여 일목요연하게 작성하였습니다.

4) 한글맞춤법을 준수하였습니다.

5) 글자 모양(맑은고딕, 장평 100%, 크기 11 pt, 자간 0%)

 

목차

1. 청동기시대 경제생활의 변화상과 군장의 등장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설명해주세요.

1) 청동기시대 경제생활의 변화상

2) 군장의 등장이 갖는 사회적 의미

2. 6~7세기 삼국 관계와 대외항쟁에 관하여 설명해주세요.

3. 신라 하대(말)의 ①동요 양상, ②새로운 세력과 사상, ③후삼국의 분열에 관하여 설명해주세요.

1) 신라 말의 동요 양상

2) 신라 말의 새로운 세력과 사상

3) 신라 말의 후삼국의 분열

4. 고려 초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관하여 서술해주세요.

5. 고려 전기 역사서 편찬과 역사 인식에 관하여 서술해주세요.

6. 참고문헌


1. 청동기시대 경제생활의 변화상과 군장의 등장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설명해주세요.

1) 청동기시대 경제생활의 변화상

미송리식 토기 : 밑바닥이 납작하고 몸체는 통통한 편, 목이 위로 올라가면서 살짝 넓어지는데, 일종의 조롱박 위아래 자른 것처럼 생김. 표면을 살아 만들었고 여러 선이 합쳐져 한 단위로 줄무늬가 가로로 여러줄 돌려져 있고, 입술 모양이나 띠 모양의 손잡이 한 쌍 또는 두 쌍이 대칭으로 붙어 있음

 

기원전 2000년경부터 1500년경 만주에 청동기가 보급되어 서서히 한반도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귀한 청동은 다루기도 어려워 지배층의 제사용 도구나 무기, 장신구 등에 사용했다. 주로 조, 피, 보리를 재배했지만, 청동기시대 들어 서서히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반달돌칼이나 돌 맛 등으로 곡식을 수확하고 민무늬 토기와 미송리식 토기 등에 곡식을 저장해 조리해 먹었다.

농사와 전쟁에 유리한 낮은 언덕에 마을이 만들어졌고 도랑이나 울타리 같은 방어 시설도 만들어졌다. 농업을 중요하게 여긴 청동기시대의 마을은 이전보다 더 큰 규모로 형성되었고 풍요로운 농산물을 기원하기 위해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농경과 목축이 발달한 청동기시대는 남은 생산물을 사유재산으로 갖게 되었다. 물론 생산량의 차이에 따라 빈부 격차가 발생하고 계급이 구분되었다.

 

2) 군장의 등장이 갖는 사회적 의미

농업을 중요하게 여긴 청동기시대는 더 많은 농산물을 수확하기 위해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주관하는 군장은 청동으로 만든 청동검과 청동방울, 청동 거울, 무기 등을 착용했다. 군장이 청동 도구를 착용한 채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자신의 권위를 높이는 행위로 볼 수 있다.

당시 권력과 재산이 많은 군장이 부족을 다스리고 제사를 이끌었다. 이러한 청동기시대는 제정일치 사회로 오늘날까지 전해진 고인돌이나 돌널무덤 등으로 당시의 사회를 유추할 뿐만 아니라 청동 검, 청동 거울 등의 유물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따라서 청동기시대의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식량을 약탈하고 좋은 토지를 얻기 위해 부족 간 전쟁이 발생했다.

 

2. 6~7세기 삼국 관계와 대외항쟁에 관하여 설명해주세요.

6~7세기 고구려, 백제, 신라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이 무렵 삼국은 각자의 세력을 확장했고 외세의 위협에 맞서고자 다양한 동맹과 여러 전쟁을 벌였다. 삼국 가운데 부흥기가 가장 빠른 고구려는 강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북방에 자리 잡은 중국과 자주 충돌했다. 수와 연합한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돌궐과 왜 등과 연합해 수와 전쟁을 벌였다.

6세기 초 백제의 성왕은 현재의 부여, 사비로 수도를 옮겼다. 당시 넓은 평야와 강을 낀 사비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성왕은 백제의 체재를 다시 정비하기 위해 22부의 관청을 만들어 행정을 분담했다. 더불어 중앙과 지방 통치 조직을 재편해 지방은 5방, 수도는 5부로 나눠 통치했다.

 

대외적으로 중국 남조와 교류했고 지금의 일본에 불교와 더불어 선진 문물을 전했다. 체제를 재정비한 백제 성왕은 신라와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했다. 당시 왕위 계승으로 권력 다툼이 심한 고구려를 백제는 한강 유역에서 몰아내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했다. 하지만 나제 동맹을 깨뜨린 신라 진흥왕에서 한강 유역을 다시 빼앗긴 성왕은 군대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했지만 결국 패배했다.

 

6세기 후반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삼국의 주도권을 잡았지만, 여전히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에 어려움을 겪었다. 외교적 고립을 겪은 신라는 그 무렵 대륙을 통일한 수와 연합해 고구려를 견제했다. 물론 세력을 넓힌 수는 고구려의 복속을 요구했지만, 고구려는 요서 지방을 공격했다. 게다가 고구려에 침략한 수는 홍수와 전염병 등으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돌아갔다. 수 양제의 요동성 공격이 실패하자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수군을 격퇴했다. 무리한 고구려 원정으로 수는 618년 멸망했다.

 

수를 이은 당나라는 건국 초기에는 고구려와 친선 관계를 유지했지만 당 태종 즉위 이후 주변을 점령하고자 고구려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당시 고구려의 권력을 손에 쥔 연개소문은 당과 신라에 강경 태도를 보였으며 이를 계기로 안시성을 공격했고 고구려는 당 군대를 격퇴했다. 고구려가 수와 당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는 원동력을 몇 가지 꼽을 수 있다. 첫째 산성을 이용한 방어 체제, 둘째 우수한 전투력, 셋째 뛰어난 제련 기술이다. 고구려는 가파른 산 등 험준한 지형에 산성을 쌓아 방어력을 높였으며 전쟁이 발발하면 산성으로 들어간 백성들이 오랜 시간 항전했다. 고구려 병사는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했고 활을 자유자재로 활용한 기병과 보병은 개마무사로 불리 울 정도로 강한 군사력을 소유했다. 요동 지방의 철광 지대를 확보한 고구려는 철이 풍부한 곳이었다. 게다가 우수한 제련 기술을 가져 철제 갑옷과 무기 제조에 능했다.

 

당과 연합한 신라는 지배층의 분열로 정치가 혼란스러운 백제와 고구려를 순서대로 공격했다. 특히 수, 당과 긴 전쟁을 치른 고구려는 연개소문 사후 혼란스러운 큼을 타 여러 성을 빼앗고 수도 평양성을 함락했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은 두 나라의 옛 땅에 웅진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두며 다스렸지만 전쟁을 선포한 신라는 매소성 전투(675), 기벌포 전투(676)에서 승리하며 당의 군대를 격파했다. 대동강 이남 지역에서 당을 몰아낸 신라는 676년 삼국을 통일했다.

 

3. 신라 하대(말)의 ①동요 양상, ②새로운 세력과 사상, ③후삼국의 분열에 관하여 설명해주세요.

1) 신라 말, 동요 양상

삼국이 통일된 후 정치적으로 안정을 이룬 신라는 8세기 후반 무렵부터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소수인 진골에게 권력이 집중돼 왕권은 약화됐고 진골마저 분열되기 시작했다. 어린 혜공왕이 즉위하자 진골 귀족은 반란을 일으켰고 이 과정에서 혜공왕은 피살되었다. 무열왕계 왕위가 끊어지자 150년 동안 대략 20여 명의 왕이 교체될 정도로 혼란을 겪었다.

 

지방에서도 귀족들의 반란이 이어져 고통받는 백성들이 늘어났다. 해상 활동으로 세력을 키운 장보고는 민애왕을 살해하고 김우장을 신무왕으로 내세웠다. 귀족들의 수탈이 이어지고 전염병이 창궐한 지역에서 토지까지 잃은 농민들은 도적이 되기도 했다. 결국 원종과 애오의 난을 시작으로 농민 봉기가 이어졌지만, 신라 정부는 무기력하게 대응했고 봉기는 점차 확대되었다.

 

2) 신라 말, 새로운 세력과 사상

지방민의 봉기가 확대되었지만 중앙군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중앙 정부의 통치력이 약해지자 점차 지방 호족들이 성장했다. 자신의 근거지 주변에 성을 쌓아 스스로 장군 혹은 성주로 칭한 호족은 지방의 행정과 군사를 장악한 상태였다. 또한 당에 유학한 6두품은 능력보다 혈통을 중시한 신라의 골품제를 비판하며 유교를 기반으로 한 개혁을 주장했다. 대표적인 6두품인 최지원은 당 유학 후 귀국해 개혁안을 올렸지만 묵살되자, 전국을 돌며 여러 글을 남겼다.

 

신라 말 새로운 불교 종파인 선종이 유행했다. 중국 남북조 시대 북위에서 활약한 승려 보리달마의 불교 수행법으로 알려진 선종은 선덕여왕 시기 신라에 전해져 신라 말에 유행했다. 주로 경전 연구와 교리를 중요하게 여긴 교종과 다르게 선종은 경전보다는 일상에서의 진리를 찾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선종의 가르침에 호족과 백성들은 크게 호응했고 호족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선종 사찰이 지어졌다. 또한 이 무렵 산과 하천의 형세가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는 풍수지리설이 유행했다. 선종 승려인 도선에 의해 널리 보급된 풍수지리설은 경주 중심이 아니라 지방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이처럼 선종과 풍수지리설은 지방 호족의 사상적 기반으로 자리 잡았다.

 

3) 신라 말, 후삼국의 분열

신라 말에 등장한 지방 세력 중 견훤과 궁예는 후삼국을 성립했다. 서남 해안을 지키며 군진의 장교인 견훤은 진성 여왕 때 발생한 농민 봉기를 틈타 자신만의 독자 세력을 형성했다. 남서부에서 세력을 키운 견훤은 후백제를 세우고 완산주를 도읍으로 결정했다. 반면 신라 왕족 출신인 궁예는 세력을 키워 고구려 부흥을 주장해 후고구려를 세웠다. 후백제와 후고구려 성립으로 신라 영토는 현재 경상도 일대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왕권 강화를 위해 호족을 탄압한 궁예 대신, 호족은 왕건을 국왕으로 세웠다. 이후 국호를 고려로 고친 왕건은 후백제의 정치적 혼란을 이용해 투항을 종용했다. 신라와 후백제를 넘어 거란에 멸망한 발해 유민까지 적극적으로 수용한 고려는 민족의 재통합을 이뤘다. 새로운 문화 토대를 마련한 고려는 건국과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지방 세력의 정치 참여를 이뤄 폭넓은 통합을 이뤘다.

 

4. 고려 초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관하여 서술해주세요.

왕위에 오른 태조 왕건은 백성의 안정적 생활을 위해 세금을 줄여 가난한 이들을 구제했다. 또한 지방을 독자 세력인 호족을 포섭하기 위해 노력했다. 유력 호족과 혼인 관계를 맺어 관직과 왕씨 성, 토지를 내려 주었고 지방 통지를 보완하면서도 사심관 제도와 기인 제도로 포섭과 견제를 동시에 견지했다.

 

또한 옛 신라인과 후백제 세력, 발해 유민도 포용했다. 건국 후 태조는 고구려 계승을 내세우며 고구려 옛 땅 정복을 위한 북진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을 중시해 그곳을 전진 기지로 삼았다. 발해 유민을 서북 지방에 머물게 하고 청천강에서 영흥만에 이른 지역까지 정복했다. 태조 왕건은 후대 왕에게 훈요 10조를 남겨 불교 장려와 유교, 도교, 풍수지리설 사상을 견지했고 중국 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할 것을 강조했다. 고려 태조가 죽은 후 외척의 왕위 계승 다툼이 있었지만, 광종의 즉위로 중앙집권 체제가 점차 강화되었다.

 

고려 초 중앙집권화를 위한 정책으로 광종의 노비안검법을 들 수 있다. 광종은 후삼국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거나 강제로 지방 세력에 의해 노비가 된 사람을 조사해 양인으로 해방했다. 또한 유학을 익힌 신진 인사를 등용해 신구 세력을 교체한 광종은 호족들도 과거제를 통해서만 중앙에 진출할 수 있도록 했으며, 공복 색깔로 관리의 위계질서를 세웠다. 게다가 자신의 개혁 정책을 반대한 신하는 제아무리 가까운 공식과 호족이더라도 숙청해 왕권을 강화했으며 자신을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국가의 위상을 높였다. 나아가 성종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채택했으며, 중앙 관제를 정비하고 지방관을 파견해 호족 세력을 약화하는 것으로 왕권의 안정을 꾀했다.


참고 자료. 태조의 “훈요 10조”

고려사에 남아 있었던 훈요 10조는 태조의 북진 정책과 민생 안정 정책 등 태조가 중요하게 생각한 여러 사상이 담겨 있다.

① 훈요1조: 국가의 대업은 여러 부처의 호위를 받아야 하므로 선(禪)·교(敎) 사원을 개창한 것이니, 후세의 간신(姦臣)이 정권을 잡고 승려들의 간청에 따라 각기 사원을 경영, 쟁탈하지 못하게 하라.

 

② 훈요2조: 신설한 사원은 (신라 말의) 도선(道詵)이 산수의 순(順)과 역(逆)을 점쳐놓은 데 따라 세운 것이다(즉『도선비기(道詵秘記)』에 점쳐놓은 산수순역에 의하여 세운 것이라는 뜻). 그의 말에, “정해놓은 이외의 땅에 함부로 절을 세우면 지덕(지력)을 손상하고 왕업이 깊지 못하리라” 하였다. 후세의 국왕·공후(公侯)·후비(后妃)·조신 들이 각기 원당(願堂)을 세운다면 큰 걱정이다. 신라 말에 사탑을 다투어 세워 지덕을 손상하여 나라가 망한 것이니, 어찌 경계하지 아니하랴.

 

③ 훈요3조: 왕위계승은 맏아들로 함이 상례이지만, 만일 맏아들이 불초할 때에는 둘째 아들에게, 둘째 아들이 그러할 때에는 그 형제 중에서 중망을 받는 자에게 대통을 잇게 하라.

 

④ 훈요4조: 우리 동방은 예로부터 당(唐)의 풍속을 숭상해 예악문물(禮樂文物)을 모두 거기에 좇고 있으나, 풍토와 인성(人性)이 다르므로 반드시 같이할 필요는 없다. (더욱이) 거란(契丹)은 금수의 나라이므로 풍속과 말이 다르니 의관제도를 본받지 말라.

 

⑤ 훈요5조: 나는 우리나라 산천의 신비력에 의해 통일의 대업을 이룩하였다. 서경(西京: 평양)의 수덕(水德)은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을 이루고 있어 길이 대업을 누릴 만한 곳이니, 사중(四仲: 子·午·卯·酉가 있는 해)마다 순수(巡狩)하여 100일을 머물러 안녕(태평)을 이루게 하라.

 

⑥ 훈요6조: 나의 소원은 연등[燃燈會]과 팔관[八關會]에 있는 바, 연등은 부처를 제사하고, 팔관은 하늘과 5악(岳)·명산·대천·용신(龍神) 등을 봉사하는 것이니, 후세의 간신이 신위(神位)와 의식절차의 가감(加減)을 건의하지 못하게 하라. 나도 마음속에 행여 회일(會日)이 국기(國忌: 황실의 祭日)와 서로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니, 군신이 동락하면서 제사를 경건히 행하라.

 

⑦ 훈요7조: 임금이 신민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우나, 그 요체는 간언(諫言)을 받아들이고 참소를 멀리하는 데 있으니, 간언을 좇으면 어진 임금이 되고, 참소가 비록 꿀과 같이 달지라도 이를 믿지 아니하면 참소는 그칠 것이다. 또, 백성을 부리되 때를 가려 하고 용역과 부세를 가벼이 하며 농사의 어려움을 안다면, 자연히 민심을 얻고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할 것이다. 옛말에 “향긋한 미끼에는 반드시 고기가 매달리고, 후한 포상에는 좋은 장수가 생기며, 활을 벌리는 곳에는 새가 피하고, 인애를 베푸는 곳에는 양민이 있다”고 하지 아니하였는가. 상벌이 공평하면 음양도 고를 것이다.

 

⑧ 훈요8조: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公州江) 외(外)의 산형지세가 모두 본주(本主)를 배역(背逆)해 인심도 또한 그러하니, 저 아랫녘의 군민이 조정에 참여해 왕후(王侯)·국척(國戚)과 혼인을 맺고 정권을 잡으면 혹 나라를 어지럽히거나, 혹 통합(후백제의 합병)의 원한을 품고 반역을 감행할 것이다. 또 일찍이 관노비(官奴婢)나 진·역(津驛)의 잡역(雜役)에 속했던 자가 혹 세력가에 투신하여 요역(徭役)을 면하거나, 혹 왕후·궁원(宮院)에 붙어서 간교한 말을 하며 권세를 잡고 정사를 문란하게 해 재변을 일으키는 자가 있을 것이니, 비록 양민이라도 벼슬자리에 있어 용사하지 못하게 하라.

 

⑨ 훈요9조: 무릇 신료들의 녹봉은 나라의 대소에 따라 정할 것이고 함부로 증감해서는 안 된다. 또 고전에 말하기를 “녹은 성적으로써 하고 임관은 사정으로써 하지 말라”고 하였다. 만일 공적이 없는 사람이거나 친척과 가까운 자에게 까닭 없이 녹을 받게 하면 백성들의 원성뿐만 아니라 그 사람 역시 복록을 오래 누리지 못할 것이니 극히 경계해야 한다. 또 이웃에 강폭한 나라가 있으면 편안한 때에도 위급을 잊어서는 안 되며, 항상 병졸을 사랑하고 애달피 여겨 요역을 면하게 하고, 매년 추기(秋期) 사열(査閱) 때에는 용맹한 자에게 마땅히 (계급을) 승진시킬지어다.

 

⑩ 훈요10조: 국가를 가진 자는 항상 무사한 때를 경계할 것이며, 널리 경사(經史)를 섭렵해 과거의 예를 거울로 삼아 현실을 경계하라. 주공(周公)과 같은 대성도「무일(無逸)」(안일, 방심하지 말라는 글) 1편을 지어 성왕(成王)에게 바쳤으니, 이를 써서 붙이고 출입할 때마다 보고 살피라.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581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동욱 민속학회 이사, 한국비교문학회 회장, 한국복식학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국문학개설』, 『한국가요의 연구』, 『고소설판각본전집』 등을 저술한 국문학자. 고전산문 인물

encykorea.aks.ac.kr

 


5. 고려 전기 역사서 편찬과 역사 인식에 관하여 서술해주세요.

역사 서술을 중요하게 여긴 고려 전기의 대표적인 역사서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이다. 김부식은 유교의 합리주의 사관에 따라 “삼국사기”를 서술했으며, 고려가 통일신라를 계승했다는 인식을 보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기전체(紀傳體) : 사마천의 사기와 같이 역사를 본기, 세가, 지, 열전, 연표 등으로 나누어 편찬하는 형식) 형식의 편찬 역사서이다.

창작이나 허구를 넣지 않고 사실을 기술한 역사서로 기록의 정확성이 높다. 이자겸의 난과 서경 천도 운동으로 약화된 왕권 회복을 위해 편찬한 삼국사기는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따라 설화나 신화 등 신비한 기록을 축소해 사실에 기반한 역사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6. 참고문헌

  • 송찬섭외(2017). “한국사의 이해”,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 박종기(2020). “새로 쓴 오백년 고려사”,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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